사우디, 아시아 원유값 6년 만에 최대 할인…한국 정유업계 숨통 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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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가 아시아로 수출하는 원유 가격을 대폭 낮췄다. 중동산 원유 공급망이 전쟁 이전 수준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 가운데 아시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호르무즈 해협 주변의 높은 해상운송 비용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11월 인도분 아랍 라이트의 아시아 공식판매가격(OSP)을 오만유와 두바이유 평균 가격보다 배럴당 5달러 낮게 책정했다. 10월보다 3달러 내린 것으로, 로이터 자료 기준 2020년 6월 이후 가장 큰 할인 폭이다. 시장에서는 오히려 11월 가격이 배럴당 최대 5달러 정도 오를 것으로 예상했던 만큼 이번 결정은 예상 밖의 인하다.
중질유 가격은 더 큰 폭으로 내려갔다. 아람코는 아시아에 판매하는 아랍 미디엄과 아랍 헤비의 11월 공식판매가격을 각각 배럴당 5달러씩 인하했다. 사우디가 아시아 정유사들의 원유 구매 비용을 낮춰주는 동시에 자국산 원유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번 가격 인하의 배경에는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은 유조선 운임이 자리하고 있다. 중동에서 중국으로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운송할 수 있는 초대형 유조선의 용선료는 최근 하루 약 12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1년 전 약 8만달러와 비교하면 운송비 부담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사우디가 원유 가격을 낮춰 구매자들의 운송비 부담을 일부 상쇄해주려는 이유다.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으로 원유 운송 경로가 복잡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호르무즈 해협의 운항 위험이 높아지면서 선박들이 우회하거나 해협 밖에서 선박 간 원유를 옮겨 싣는 환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사우디는 9월부터 호르무즈 해협 바깥에서 선박 간 환적을 통해 수백만 배럴의 원유을 수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디는 수출 경로를 다변화하는 움직임도 이어가고 있다. 동서 송유관을 이용해 홍해 쪽으로 원유를 이동시키고 있으며, 드론 공격으로 잠시 가동이 중단됐던 홍해 연안 얀부항에서도 원유 선적을 재개했다. 이 같은 우회 수출망이 확보되면서 중동산 원유의 실제 공급량도 점차 회복되는 모습이다.
사우디가 모든 지역의 원유 가격을 낮춘 것은 아니다. 북서유럽에 판매하는 11월 인도분 원유 가격은 유종별로 배럴당 3달러씩 올렸다. 미국에 대한 판매가격은 기존 수준을 유지했다. 아시아에 대해서만 상대적으로 큰 폭의 할인에 나선 것은 아시아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 등 경쟁 산유국과의 시장 점유율 경쟁이 중요하다. 중동 지역의 원유 수출이 회복되면서 산유국들이 다시 아시아 시장에서 판매량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운송비가 급등한 상황에서 가격까지 높게 유지할 경우 아시아 정유사들이 다른 산유국의 원유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국제 원유시장의 공급 불안도 이전보다 다소 완화되는 분위기다. 중동 원유 수출량이 전쟁 이전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는 데다 주요 산유국들은 11월 생산 목표를 기존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동시에 주요 7개국은 시장 안정을 위해 비축유와 석유제품을 시장에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실제 국제유가도 공급 우려가 완화되면서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 최근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도는 수준이지만 중동 원유 공급 회복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사우디의 이번 가격 인하를 국제유가가 곧바로 급락한다는 신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중동의 원유 공급은 회복되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상 운송 비용 역시 평상시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더구나 사우디 아람코의 최고경영자는 전쟁 이후 감소한 글로벌 원유와 정제유 재고를 다시 채우는 데 최대 2년이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공급이 시장에서 사라졌고 비축유까지 사용된 만큼, 수출 흐름이 정상화되더라도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완전히 안정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에는 이번 가격 인하가 비교적 긍정적인 소식이다. 한국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를 대량으로 들여오는 만큼 사우디의 공식판매가격 인하는 원유 조달 비용을 낮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원유 자체 가격뿐 아니라 높은 운송비 부담까지 일부 보전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정유업계의 실제 비용 부담은 단순히 사우디의 판매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유조선 운임과 보험료, 호르무즈 해협의 위험 프리미엄, 환율, 국제유가 등이 함께 반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디의 가격 인하가 국내 휘발유와 경유 가격에 즉각적으로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을 수 있다.
사우디의 아시아 원유 가격 인하는 한국 경제에는 에너지 비용을 낮출 수 있는 긍정적인 요인이다. 한국은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중동산 원유의 구매가격이 낮아지면 정유사의 원가 부담을 줄이고 석유화학과 운송 등 연관 산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현재처럼 국제유가가 높은 상황에서는 배럴당 몇 달러의 원유 구매가격 차이도 정유사의 수익성과 국내 물가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원유 가격과 운송비가 동시에 안정될 경우 휘발유·경유 가격뿐 아니라 항공·해운·물류 비용에도 하락 압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사우디가 아시아 시장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우디가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 정유사들을 대상으로 가격 경쟁력을 높인다면 중동산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으로서는 중동산 원유 공급망을 유지하면서 장기 구매계약 조건을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번 할인은 중동 정세가 완전히 정상화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우디가 가격을 낮추는 한편 높은 운송비를 보전해야 할 정도로 해상 운송 환경이 불안정하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다시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면 운임과 보험료가 재차 급등하면서 원유 가격 인하 효과가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다.
앞으로 국제유가의 핵심 변수는 중동 원유 공급량 회복 속도와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 여부가 될 전망이다. 공급이 계속 회복되고 사우디를 비롯한 산유국들이 아시아 시장에 대한 가격 경쟁을 강화한다면 국제유가는 점차 안정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간 군사적 충돌이 재차 확대되거나 주요 송유관과 항구가 공격받을 경우 현재의 공급 회복세가 다시 꺾일 수 있다. 이 경우 사우디의 가격 할인만으로는 국제유가 상승을 막기 어려울 수 있다.
결국 이번 사우디의 파격적인 가격 인하는 중동 원유시장이 공급 부족 일변도에서 점차 시장점유율 경쟁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한국 경제에는 단기적으로 원유 조달 비용과 물가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기회지만, 지정학적 위험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국제유가의 높은 변동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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